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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을 올리다

``우리는 더 나은 과학과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추구한다!'' 2016년 6월 18일 ESC가 창립대회를 열며 내건 기치입니다. ESC는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의 영문 이름인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의 머리글자입니다. 컴퓨터 자판 맨 왼쪽 위에 있는 키를 나타내는 기호이기도 하지요. ESC엔 그렇게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 현실의 구태에서 벗어나자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만은 아니라는 생각, 과학과 수학이 사유방식이자 문화로서 핵심 교양(Liberal Arts)의 한 축이라는 생각, 그래서 과학·수학적 사유와 태도가 자유롭고 비판적인 민주공화국 시민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 과학기술이 권력 집단이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 과학기술자들이 시민사회와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때가 무르익었다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 시점이 2016년이었던 건, 시절이 특히 엄혹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론 2015년 11월 평화의 섬 제주에서 있었던 워크숍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과 진보'라는 거창한 주제로 1박 2일 동안 열린 워크숍에서, 18명의 참석자가 ESC를 만들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어 2016년 1월부터 다섯 차례의 오프라인 모임과 수많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100여 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설립 후 2년이 지난 뒤인 2018년 6월 현재, ESC엔 500여 명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학생은 23\%고, 여성은 33\%며, 오프라인 활동의 여성 참여율은 50\% 안팎에 이릅니다.

일을 하다

ESC는 일을 하려 합니다. 전체 프로그램은 집행위원회에서 기획하지만, 여섯 개의 전문위원회(과학문화위원회, 청년과학기술인위원회, 크라우드펀딩위원회, 열린정책위원회, 과학교육위원회, 해외과학기술인위원회)가 분야별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과학문화위원회는 강연과 기고 외에 어른이 실험실 탐험'을 운영해 어른들이 과학 활동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른이는 어린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어른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파리를 직접 관찰했고, 커피 방울에 담긴 과학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로봇 실험실도 찾았고, 세이프캐스트와 더불어 방사능 측정기를 조립해보기도 하였으며, 제주 국립기상과학원도 방문했습니다. 이런 행사의 바탕엔, 과학은하는 것'(doing science)이며 결과보단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청년과학기술인위원회에선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 같은 청년 과학기술자의 인권에 관심이 있습니다. 실험실 안전과 관련해선 연구실안전법과 연구활동종사자보험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원생이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은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이라는 시민권의 문제와 대학의 재정이라는 현실의 문제가 겹쳐 있습니다. 해법 마련이 쉽진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논점을 제기할 것입니다. 청년 일자리를 주제로 간담회도 열었습니다. 연구실 생활의 가상 체험을 위한 게임화 작업도 진행하여 두 종류의 보드게임을 제작한 바 있기도 합니다. 청년 PI(연구책임자) 육성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크라우드펀딩위원회는 시민이 원하는 연구과제를 시민이 지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과제를 발굴하는 일도 하지요. 2016년 12월 고려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의 트랜스젠더 건강연구'가 첫 과제로 선정되었습니다.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서 힘들게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트랜스젠더의 건강은 당연히 정부가 챙겨야 하는 문제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ESC는 차선책으로 이 연구를 크라우드펀딩에 부치기로 하였습니다.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ESC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과제였습니다. 다행히 크라우드펀딩은 성공했고, ESC는 의미 있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동적인 경험이었지요. 그다음 과제는 한양대 한재권 교수 연구팀의스키 타는 로봇'이었습니다. 시민과 함께 만드는 로봇 프로젝트였는데, 이 과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2017년 4월에 출범한 과학교육위원회는 교양으로서의 과학 교육에서부터 창의적 과학기술자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 개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논점을 다양하게 짚어 왔습니다. 과학교육에서 과학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고교생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플랫폼 마련, 시민과학교육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등, 구체적인 고민도 하고 있지요. 2018년 2월 열린 'ESC, 과학교육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시작으로, 앞으로 정기적인 심포지엄을 개최해 나갈 예정입니다.
열린정책위원회의 출발점은 2017년 2월 `대통령 후보에게 무엇을 묻고 요구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타운미팅이었습니다. 타운미팅의 결과물은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되었고, 당시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가 ESC에 답변서를 보내온 바 있습니다. 열린정책위원회는 매달 세미나를 열며 주로 국가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한 공부를 해왔습니다. 브릭과 더불어 과학기술계 리더십, 헌법 속 과학기술, 국내 다문화(외국인 연구자와 학생) 연구실의 현황과 문제점 등, 다양한 주제의 설문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과학기술과 헌법에 관한 세미나와 설문 조사는 헌법개정 TF로 이어져 국내 과학기술 단체론 처음으로 개헌안을 제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17년 12월의 일입니다.
헌법개정 TF가 제안한 개헌안의 요지는 우선 헌법 제9장(경제) 제127조 제1항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명시한 부분을 삭제하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학술 활동과 기초 연구 장려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제1장(총강)에 두자는 견해도 덧붙였지요. ESC의 개헌안은 시민 1007명의 서명과 함께 국회와 정부에 제안되었습니다. ESC는 이런 노력이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 `기초 연구 장려'가 언급되도록 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26일에 발의한 개헌안은 5월 24일 국회에서 폐기되었습니다.
ESC 전체의 문제를 고민하며 주요 결정을 내리는 집행위원회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당해왔습니다. 황우석 사태 10년인 2016년 11월엔 한국 과학기술 진보를 위한 국가 시스템 진단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2017년 4월에는 트럼프 정부의 반(反)과학 정책으로 촉발된 국제적 과학 행진(March for Science) 운동이 한국에서도 있었는데, ESC는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 같이 이를 기획하고 주도했습니다. 7월엔 청와대 국민인수위원회가 마련한 광화문 1번가에서과학과 기술이 즐거운 나라'라는 제목의 열린 포럼을 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겨울에 촛불을 들었던 광화문 광장에서 여름엔 기초과학, 과학기술정책, 과학교육, 청년과 여성 과학기술인을 주제로 뜨겁게 토론했던 것입니다. ESC는 그렇게 겨울에도, 여름에도 광장에 있었습니다.
개헌안을 제안하고 활동을 종료한 개헌 TF 외에도 ESC엔 다양한 소모임이 꾸려져 있습니다. 지역 모임도 있고,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문화를 만들다
개헌안 제안 이외에 ESC는 2년 동안 두 번의 성명과 두 번의 논평을 냈습니다. 첫 성명서는 2016년 11월 4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책임을 묻는 시국선언문이었습니다. 2017년 9월의 논평에선 정부의 과학관(觀)에 대한 비판을 담아 `과학을 경제의 도구로만 보지 말아 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ESC가 사안마다 성명을 발표하는 곳은 아닙니다. ESC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다양한 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려 합니다. ESC 전체가 성명이나 논평을 내는 일은 모든 회원이 글 하나를 같이 쓰는 거나 마찬가지니,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결국, 절차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ESC 이름의 견해는 회원 과반의 응답과 응답자 2/3 이상의 동의를 얻어 발표하기로 한 것입니다. 정부의 과학관(觀)을 비판한 2017년의 논평도 이런 절차를 거쳐 나오게 되었습니다.
ESC는 조직 내 민주주의와 수평적 소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ESC 안에선 나이와 직위를 따지지 않고 이름에 `님' 자를 붙여 부르지요. 서로 높이는 부드럽고도 평등한 언어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ESC의 일상이 되리라 믿습니다. ESC는 그 어떤 단체나 조직보다도 민주주의를 잘 실천하려 합니다.
여럿이 같이 가다
ESC는 과학기술자 모임이 아니라 과학기술인 공동체입니다. ESC에선 과학기술자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관해 고민하는 과학기술학자와 저술가, 과학기술 관련 교사와 문화·예술·언론인,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시민을 모두 일컬어 과학기술인이라 합니다. ESC엔 그렇게 조금씩 다른 데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과학기술인이 모여 있지요.
다양성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일반회원이나 학생회원이나 회비 관련 규정만 다를 뿐 권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ESC 2기 이사회엔 학생 회원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투표로 뽑아 추천한 학생 회원을 총회에서 이사로 선출한 것입니다. 소수자 차별에 반대함은 물론입니다. 젠더 감수성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ESC는 더 많은 청년과 여성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이제 겨우 첫 2년이 지났을 뿐인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너무 많은 일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내실을 다질 시간이 부족했다는 변명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토론과 의사 결정에 알맞은 온라인 환경을 구성할 필요도 있습니다. 모든 활동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다 잘되리란 희망이 있습니다. 현명한 과학교사인 한문정 대표가 ESC 2기를 이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엔 ESC의 집단지성이 있습니다.
ESC 1기를 돌아보며 제대로 된 나침반은 바늘 끝이 늘 떨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은 고장 나 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더 나은 과학과 더 나은 세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고장 나지 않도록, ESC도 늘 성찰해야 하겠지요. ESC에 대한 건설적 비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좋은 세상을 숙고하는 모든 이와 함께할 것입니다.
윤태웅 (ESC 1기 대표·고려대 공대 교수)